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조의 서주 침공 (문단 편집) === [[서주]](徐州) 출신 인물들 === 수많은 [[서주]](徐州) 출신 인물들이 전란을 피해 타 지역으로 피난갔는데 주로 간 곳은 [[양주(중국)|양주]](揚州)와 [[형주]](荊州)였다. 동오에서 본거지 양주 다음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이 서주의 전란을 피해 양주로 이주한 서주 사람들이었다. 동오의 명신인 제갈근, 보즐, 노숙, 여대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하는 서주 출신 인물들과 당시 서주에 있던 인물들의 목록이다. * [[위(삼국시대)|조위]] * [[진등]], [[진규]] - 서주(徐州) 하비(下邳國) 회포현(淮浦縣)[* 『후한서』 「진구열전」에 의하면 진규의 백부인 진구가 하비국 회포현 사람이다.] * [[진교(삼국지)|진교]]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동양현(東陽縣)[* 난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했는데 후에 돌아와 광릉태수 진등의 공조가 되었고 계속해서 조조 세력, 위나라에서 일했다.] * [[왕랑]] -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담현(郯縣) [* 도겸의 추천으로 회계태수가 되었는데, 이때 조욱이 같이 광릉태수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조가 서주를 침공할 당시에는 서주에 없었고 이미 회계군에 부임한 것으로 보인다.] * [[장패]] - 연주(兗州) 태산군(泰山郡) 화현(華縣) [* 서주 출신은 아니나 태산군 화현은 서주와 경계에 존재한다. 또한 도겸으로부터 기도위로 임명되어 도겸 휘하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 [[제갈탄]]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제갈장(諸葛璋)?''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삼국지 제갈량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달며 인용한 제갈량집에 나오는 인물로, 223년 경에 위나라에서 알자복야 직위를 역임한 인물이다.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낸 것 외에는 알려진 행적이 전무하나, 당시 존재하는 제갈씨는 모두 낭야국 양도현이 본적이었으므로 제갈장 역시 낭야국 양도현 출신일 확률이 높다.][* 제갈근전 주석에 인용된 위요의 오서에 의하면, 제갈근의 선조는 본래 갈씨로 낭야국 제현(諸縣) 사람이었는데 후에 낭야국 양도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양도현에는 이미 갈씨가 존재하여 사람들이 제갈근의 선조를 제갈(諸葛)씨라 불렀고, 이 때문에 제갈씨가 되었다. 제현 출신의 갈씨가 이주했는데 이주한 곳에 원래 갈씨가 존재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탄생한 성씨이므로 양도현 외에 제갈씨가 존재할 확률은 극히 낮으며 양도현 출신이 아닌 제갈씨가 존재했다는 별도의 근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당시 제갈씨들은 모두 양도현 출신으로 취급해야 한다.] * [[촉한]] * [[미축]], 미방 -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구현(朐縣) * [[제갈량]]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오(삼국시대)|손오]] * [[제갈근]]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 [[서성]] -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거현(莒縣) * [[장소]] - 서주(徐州) 팽성국(彭城國) * [[엄준]] - 서주(徐州) 팽성국(彭城國) * [[보즐]] - 서주(徐州) 임회군(臨淮郡) 회음현(淮陰縣)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회음현(淮陰縣) * [[노숙]] - 서주(徐州) 임회군(臨淮郡) 동성현(東城縣) → 서주(徐州) 하비국(下邳國) 동성현(東城縣) * [[여대]]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해릉현(海陵縣) 참고로 [[노숙]]의 고향인 임회군은 [[서한]] 시절 때 설치된 행정구역으로, [[동한]] 말 하비국에 편입되었다. 다만 노숙의 고향인 동성현은 회수 이남으로 조조와 도겸의 분쟁 지역과 어느 정도 거리가 존재하고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술이 노숙의 명성을 듣고 동성현의 장으로 임명했으나 노숙은 원술이 공업을 세우기에 부족하다 보고 사람들을 인솔해 남쪽의 거소현으로 가서 주유를 따랐다. 주유가 동쪽으로 장강을 건널 때, 그를 따라 동행하다가 곡아현에 거처를 정하고 머물렀다. >---- >『삼국지』 「노숙전」 노숙이 거소현으로 간 것은 원술이 공업을 이루기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조조군의 학살을 피해서 간 것이 아니다. 여대의 고향인 해릉현은 서주 소속이긴 하나, 조조의 침공 지역이 아니었고 심지어 장강 북변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조의 침공을 피해 도망칠 위치도 아니다. 장소가 서주를 떠난 것은 조조의 서주 침공 이전에 관리와 갈등이 있어서였다. 보즐의 경우 고향인 회음현이 회수 이남에 위치하며, 조조가 침공한 지역이 아니었다. 다만 조조의 1차 침공 때 큰 피해를 입은 지역과 회음현은 거리가 가까운 편이므로 조조의 침공을 피해 달아났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성의 고향인 낭야군은 조조의 침공 지역이었으므로 마찬가지로 가능성이 있다. 제갈량과 동생 제갈규의 경우엔 숙부인 제갈현이 원술로부터 예장태수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유표한테 의탁했다고 나오기에 고향을 떠난 직접적인 이유는 제갈현이 원술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다. 특히 제갈량의 경우 본전에 난을 피해 이주했다는 언급조차 나오지 않는다. 제갈근은 난을 피해 강동으로 왔다고 하나, 제갈근이 도착했을 무렵에 이미 손책이 죽었다고 하니 피난을 간 시점은 조조의 침공 시점과는 별개인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면 조조의 학살을 피해 도망쳤다고 추정할 여지가 있는 인물은 서성, 보즐 정도이다. 이마저도 구체적인 시점이 언급되지 않고 전란을 피해 내려갔다는 묘사만 있기에 황건적의 난, 착융의 수탈, 원술, 유비, 여포의 분쟁, 조조와 여포의 분쟁, 조조와 유비의 분쟁 등 다른 이유로 피난 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이번에는 다른 지역을 살펴보자. [[여범]]은 여남군 사람인데 난을 피해 수춘으로 가서 [[손책]]을 만났으며, 이후 그를 따라 강동으로 갔다고 한다. [[호종]]은 여남군 사람이며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 정병은 여남군 사람이며 난을 피해 교주로 갔다. [[복양흥]]은 진류 출신이고 아버지 복양일이 난을 피해서 강동으로 내려왔다. [[법정]], [[맹달]] 역시 난을 피해 익주로 들어간 사례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난을 피해 익주, 형주, 양주로 내려간 사람은 결코 드물지 않다. 그렇기에 피난을 간 인물이 조조군의 학살을 피해서 내려갔다는 묘사가 존재하거나 피난을 간 시점이 조조군의 서주 침공이 아닌 이상, 그 인물이 조조를 피해 내려갔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들이 황건적을 피해 내려갔을 가능성도, 착융과 같은 인물의 수탈을 피해 내려갔을 가능성도 모두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주는 남북으로 길이가 300km가 넘고, 중간에는 회수라는 강이 동서로 가로질러 흐른다. 서주의 중심 도시인 팽성의 경우, 낭야국 거현, 광릉군 회음현보다는 오히려 예주 양국 수양현과 거리가 더 가까우며, 예주 패국 패현, 일명 소패는 당연히 수양현보다도 팽성과 더 가깝다. 조조의 1차 침공 당시 공격한 지역들 중 수릉현, 하구현 등 서주 북부의 낭야국보다는 예주 동부의 패국과 더 가까우며, 조조의 2차 침공 당시 공격한 지역인 낭야국은 서주 남부의 광릉군보다는 청주 제국, 북해국과 더 가깝다. 심지어 여대의 고향인 해릉현보다 연주의 방여현, 임성현이 팽성, 담현에 더 가깝고, 장패의 고향인 연주 태산군 화현이 보즐의 고향인 회음현보다 도겸이 농성한 서주 동해국 담현에 더 가깝다. 이러한 사실들은 서주 출신 인물이 전란을 피해 이주했으니 조조 학살의 피해자일 것이라 추측하거나 서주 출신 인물들 중에서만 조조 학살 피해자를 찾으려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인지 보여준다. 다만 유독 동오의 역사를 다룬 『삼국지』 「오지」나 오나라의 어떤 인물이 지은 「[[조만전]]」에는 조조의 잔인함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서주에서 동오로 내려온 내려온 유랑민들의 기억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